15회 즈음부터 밀도감이 확 떨어지더니 과거찾기에 몰두해 정체되고 눈물에만 의존하던 스토리는 막판에 캐릭터 붕괴의 위험수위를 넘나들었다. 시간이 없었을 거라고 배우들도 스탭들도 힘들어서 그럴 거라고 아무리 이해하려 해본들, 수준 높은 포장이 걷힌 오글오글 장면들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더라. 그래서 슬펐다. 기대했던 미지의 X는 턱시도 가면인 줄 알았고... ㅠㅠ 위기로 작용할 뻔했던 옛친구나 사촌형, 약혼녀도 별로 걸림돌이 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이 드라마 최대의 악인은 신세기였을 거다. 차도현의 할머니인 회장님과 학대의 가해자였던 아버지가 진정한 악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순간부터 폭력전과에 빛나는 신세기를 따를 악당은 사라졌다. 하지만 이놈도 여주 앞에선 꼬리 내린 강아지가 된지 오래니, 사촌형과 그의 아버지가 그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들은 원래 비중이 쥐꼬리였던 거지. 재벌가를 박살내겠다던 포스 쩌는 신세기나 그 신세기를 박살내줄 것 같던 회장님이 악의 축을 담당해주는 게 맞았던 걸까. 누워서 회상에만 출연하시는 아버지께서는 그 회상에서조차 잔인함을 안 보여주시니 악인은 세기와 회장님, 피튀기는 대결도 세기와 회장님 도현과 리진의 4파전이어야 했나봐... 그러나 드라마는 오리온을 섭남으로 삼은 죄로 중반 이후 도현이와 리진이의 사랑의 위기에만 열중해 왔고.. 그리하여 세기와 대적할 일이 없어진 회장할머님께서도 갑자기 착해질 수밖에 없었나 보아... ㅜㅜ
즉, 이 드라마의 핵심적인 갈등이 내면(인격들의 존재 자체)에 있었다면, 그 인격들의 폭주나 비밀의 폭로가 가장 큰 위기여야 할 텐데... 어쩌다 사랑의 위기와 과거의 비밀에 몰두하면서 (사실 남주여주가 과거의 사연 때문에 맺어지기 힘들다는 설정 자체가 납득하기 힘들었고--잘못은 아버지가 다 했는데 왜?!--빵 터뜨리지 않고 찔끔찔끔 밝힌 비밀은 예상 이상을 보여주지 못해서 시시했다!) 정체성의 혼란과 위기는 사뿐히 놓아버렸더라고. 그런 와중에 옛친구의 등장이 좀 쫄깃하게 붙을까 했더니 그마저도 흐지부지. 악인 없는 착한 드라마 쓰기가 이렇게 힘든 거구나... 자꾸 많이 슬퍼져. 이 드라마가 끝까지 쌍엄지를 치켜세울 완성도를 지녀주길 바랐던 만큼 용두사미 되는 건 보기 싫었거든. 다행히 20회는 이전보단 나은 마무리를 지었는데, 대본보다는 연기 덕인 듯... 인격 융합이라는 정체성 문제로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던져놓은 모든 떡밥을 회수하기엔 많이 많이많이많이 아쉬운 엔딩이었다.
이하, 내가 생각한 이 드라마의 아쉬운 점들. 기대했는데 어물쩍 넘어간 것들. (안봐도 되는 그런 거)
1. 요나랑 리진의 머리채 싸움 씬에서 - 분명히 여고생들이(그것도 무시무시한 아이돌 팬들이!) 동영상 다 찍었는데 하나도 유포되지 않은 거. 난 정말 이제 어떻게 되려나 가슴 졸이면서 봤다니까, 이 장면! 이 멋진, 절체절명의 폭로 위기를 무시한 게 첫번째 화근이었다고 난 생각해... 이야기가 일파만파 번졌으면 했는데. 회장님이랑 사촌형 부자가 난리날 수 있게.
2. 기억을 되찾은 후 도현이가 - 이전보다 훨씬 인격 출현을 통제하게 되는데 이거, 반대였어야 하지 않나? 감당하기 힘든 기억을 되찾았을 때 그 혼란을 틈타 더더욱 통제가 되지 않는 게 다중인격 아닐까? 난 주(主)인격의 갑작스런 성장보다는 이런 혼란을 오리진과 주변인들이 어떻게 통제하고 이용할지가 더 궁금했어. 그래야 현재 벌어지는 사태들을 수습하려고 차도현이 더욱 강해지는 '현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을 것 같고... 이게 길을 잘못 탄 두번째 화근이었다고 난 생각함...
3. 악의 축은 신세기로 해주지 그랬어 - 그러니까 주인공 최대의 위기는 자기 자신의 인격들, 그중에서도 제일 위험한 신세기여야 하지 않았을까. 그의 존재가 현재를 일그러뜨리고 과거를 파헤치고 그래서 (그의 대사처럼) "차도현이 감당할 수 없어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했어야 하지 않을까. 난 그걸 기대했는데. 자기 파괴의 인격, 재벌가를 무너뜨리는 복수를 하고 그것을 오리온이 소설로 써서 돕는 그 전개를 기대했다고. 중간에 분명히 그러자고 해놓고 왜 없앤 거야 왜.....ㅠㅠ 힝.
4. 도현이 아부지는 잔인했어야지 - 인격이 조각나고 두 아이가 통째로 기억을 잃을 만큼의 학대였다며... 실루엣 정도로 피상적으로 그려지니까 어린 도현과 리진의 아픔이 체감되지 않았어... 그게 약하니까 이후의 기억찾기 이름찾기가 다 헛헛하더라.
5. 석호필은 왜 회장할머님에게 순순히 까발렸는가 - "가족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극"이 주인공의 문제라며, 절대 알려져선 안 된다며! 그래놓고 쉽게 밝히고 할머니는 그걸 또 쉽게 받아들이기야? 그러기야 응? 응? 의사가 그렇게 막 비밀유지 의무 저버리고 제자가 환자랑 럽럽한다고 그거나 타박하고 그러기냐고? 응!
6. 이름의 반전, 차도현의 인생 전체를 빼앗은 것이길 바랬어 - 차도현의 이름으로 살게 된 것이 좀더 깊은 음모일 줄 알았다. 한 아이를 철저히 사장시키고 대체품을 키워낸 그런 거... 근데 그러려면 오리진이 원래 재벌가의 순혈이어야 했겠지. 그러면 이복남매 되니까 할 수 없었겠지. 그래도, 적어도, "너는 오늘부터 차도현이야" 이래주길 바랬는데, 왜 주인공 너님이 차도현을 자처했니............ㅠㅠ
7. 스스로 깨우치는 사람들 vs. 스리슬쩍 꼬리 내린 사람들 - 이 드라마의 악역 퇴장법. 딱 저 둘 중에 하나다. 알렉스 같은 옛친구는 도박빚도 많으면서 도현이의 돈 안 줘 친구 드립에 깨달음을 얻으셨는지 순순히 꼬릴 내렸고, 회장할머니 어영부영 그랬고, 깨어난 아부지 그랬고, 자살지원자 요섭이도 그랬고, 어느 순간 세기도 그랬다(오리온이 "자격 없는 승진가의 아들"이라고 쿡 찌르니까 푹 찔려서 덜덜덜. 뭔데요, 그게 왜 자격 없는 건데요. 그래서 다 엉망으로 만들어 준대놓고 오늘부터 리진이 네 말이 법이야~ 요럼서 은근슬쩍 꼬리 내려버리는 융합형 자퇴자). 사촌형 아부지와 약혼녀도 한번 찔렀다가 차도현이 팽하니까 후다닥 퇴장하고... 저 많은 악의 축 중에서 하나쯤은 끝까지 개겼어야 하는 거 아님메? 메애애애애?
하나의 좋은 드라마가 또 이렇게 평범해져 끝났습니다... 쌍엄지 치켜세우고 싶었던 드라만데... 그래서 슬퍼요 ㅋㅁㅎㅁ.. 안녕. ㅠㅠ
그래도 즐거웠어용.
+) 내가 킬미힐미를 좋아했던 점들.
오랜만에 예측불가의 전개. 멍뭉이 차도현의 짠내와 병맛 신세기의 오글오글 카리스마. (안소니와 병맛 테리우스 같은 ㅋㅋ) 다양한 인격들과 그로 인한 낭패들. 키스하다 바뀌는 거 대박. (여주를 농락하는 로코 ㅋㅋ) 여주와 섭남, 안실장에 이르는 대박 리액션들. 연기도 물론! 비밀이 주는 쫄깃함. 비밀을 풀어야 성장하는 남주의 과제. 역대급 아픈 연기. "우리는 안돼" 남주여주의 딜레마. 인격들의 모습을 조금씩 닮아가는 주인공의 변화. 개콘 개그.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