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s24 푸우 님의 리뷰
베토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1970년대 초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100장이 넘는 LP판의 기념비적인 베토벤 전집이 나왔을 때, 아마도 당시의 집 한 채 가격에 육박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걸작이 아직껏 이빨 빠지지 않은 채 양호한 상태로 중고시장에 등장한다면 지금도 여전히 고급 승용차 한대 가격은 넉근하리라 봅니다.
"Cascade-GmbH"(http://www.cascade-medien.com)란 다소 생소한 독일의 소형 음반사(주로 염가형 클래식 음악 DVD 세트를 보급하는 회사임)에서 나온 이 베토벤 전집은 무엇보다 그 놀라운 가격이 최대 장점이라 할 것입니다. 택배비 빼고나면 말그대로 장당 1,000원에 불과하니, 정말 21세기 문명이 허락한 벼락같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CD 자켓이나 포장 박스, 심지어 연주자와 녹음상태를 두고 이런저런 토를 다는 분들이 계신데, 저로서는 떡볶이·꼬지 파는 포장마차에서 비프 스테이크와 고급 와인을 논하는 것처럼 생뚱맞게 들립니다. CD 장수(狀數) 안빠지고 제대로 다 들어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 아닌가요.
작품번호(Opus)가 붙어 있는 곡 중에는 무려 7곡(!)이나 빠져 있습니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Op.41 피아노·플루트·바이올린을 위한 세레나데
Op.42 피아노와 비올라을 위한 녹턴
Op.61(a) 바이올린 협주곡의 피아노 협주곡 편곡판
Op.63 피아노삼중주
Op.64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소나타
Op.104 현악오중주
Op.114 <아테네의 폐허> 중 합창이 있는 행진곡
'엉! 이렇게나 많이 빠졌다니' 깜짝 놀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막을 자세히 보면 Op.41은 Op.25(플루트·바이올린·비올라 삼중주)의 편곡판이고, Op42는 Op.8(현악삼중주), Op.63은 Op.4(현악오중주), Op.64는 Op.3(현악삼중주), Op.104는 Op.1-3(피아노삼중주)의 편곡 버전입니다. 이 5작품은 3~5 종류의 악기 편성만 달리한 비슷한 분위기의 실내악이므로 어느 편(원곡 또는 편곡)을 들어도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양쪽 다 빠짐없이 넣었더라면 훨씬 좋았겠지만, 이 정도의 편집방침은 수긍이 가는 일이지요. Op.114는 극(劇)부수음악 Op.113<아테네의 폐허> 안에 포함되어 있는 합창곡 한 편에 독립된 작품번호를 붙여 출판한 것이니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워 한 것은 Op.61의 피아노 협주곡 버전입니다. 이 곡은 피아노 비르투오조인 베토벤 자신에 의하여 편곡되었고, 완전히 새로운 카덴짜가 붙어 있어 가히 6번째 피아노 협주곡이라 칭해도 괜찮을 명곡입니다만, 이 전집에서는 생략되고 말았군요.
하지만 이러한 아쉬움을 보상할 썩 괜찮은 음반이 하나 보너스로 들어 있습니다. 47번 CD에서 생경한 피아노삼중주가 한 곡 눈에 띄는데, 이것은 교향곡 2번(Op.36)의 편곡판입니다. 이런 편곡이 있는 줄도 처음 알았지만(무슨 의도로 편곡되었는지는 아직 조사중입니다), 아주 웅장하면서 깔끔한 피아노삼중주입니다. 이 전집에 들어있는 원래 교향곡 연주보다 훨씬 나아 보이더군요. 이 곡은 독립된 목록번호가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는 사람도 거의 없어, 전집에서 빼더라도 크게 표가 나지 않았을 터인데, 이처럼 귀한 연주를 들을 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습니다.
작품번호가 없는 작품(WoO : Werke ohne Opuszahl, Works without opus) 중에는
WoO 4 피아노 협주곡
WoO 12 12개의 미뉴엣
WoO 16 12개의 에코세즈
WoO 17 11개의 춤곡
이 빠져 있습니다.
(WoO 100 ~ WoO 200 사이에는 수백곡의 리트가 자리하고 있는데, 목록을 일일히 대조하다가 지쳐서 마무리짓지는 못하였으되, 대략 거의 다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WoO 4의 피아노 협주곡은 베토벤의 10대 중반 본(Bonn) 시절의 습작으로 유감스럽게도 오케스트라 파트의 악보가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WoO 12,16,17의 작품들은 현재 위작(僞作) 시비가 붙어 있는 바, 이런 연유로 빠지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특이할만한 구성은 베토벤이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여 쳐박아 두었던 <레오노레(1805년作)>(Hess 109번호가 붙어있군요)를 CD 2장(CD 16,17)에 걸쳐 담았다는 점입니다. 박물관에나 잠들어 있음직한 악보가 문득 CD로 현시되다니 전율할 일입니다. 함께 들어있는 <피델리오>와 비교해서 들어보는 것도 또한 희귀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Opus가 붙은 곡들만 챙겨 놓고 이른바 "전집"이라 주장하는 것도 크게 흉잡힐 만한 일은 아닙니다. 거기다가 WoO 목록의 곡들까지 다 모아서 "완벽한 전집"이라 선언한다면 왠만한 사람들은 다 수긍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집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가고 있습니다. WoO 에서 빠진 "Hess", "Biamonti"번호가 붙은 곡들도 30곡 이상 취하였고, 85번 CD에는 이러한 목록에서 빠진, '소품'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스케치 소절까지 녹음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현재까지 구할 수 있는 모든 악보를 다 집어넣고 보자는 야심찬 계획이 끝내 실현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연주나 녹음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이 '가격'에 대하여 예의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내친김에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독일어와 영어가 짬뽕이 된 알파벳 목차의 booklet은 그다지 쓸모가 없는데, 필요한 정보인 곡명과 연주자는 각 CD의 마분지 자켓에 빼곡하게 들어 있습니다. 연주자나 연주단체의 프로필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확실히 녹음 연도와 장소, 녹음 방식의 표시가 생략된 점은 이 전집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음반사의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을 수 있는 46쪽 짜리 카탈로그에도 자켓에서 구할 수 있는 이상의 정보는 없더군요.
모두 784곡이 들어 있고, 111곡은 이 전집을 위하여 새로 녹음되었으며 그중 일부는 최초의 녹음이라고 합니다. 1987 ~ 2007년 사이의 녹음이니까, 대부분 컴필레이션 음반에서 접하기 마련인 골동품 녹음이 낑겨져 있지 않은 점은 높이 살만 합니다. 유명한 거장들의 모습이 그다지 눈에 띄진 않지만, 나름대로 실력 있는 소장파 연주자들이 상당수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마이너 레이블이라 하더라도 음원(音源)을 남길 정도의 실력은 갖췄다고 인정해야겠지요. 물론 Cascade 같이 소규모 음반사가 이 모든 음원을 보유하지는 못했을 터, 고만고만한 타음반사로부터 라이센스 받은 것이 상당히 많고 개중에는 "NOXOS"가 역시 돋보입니다.
대개 전집이든 선집이든 베토벤집(集)을 만든다면, A지휘자의 교향곡 전집, B피아니스트의 소나타전집, C사중주단의 현악사중주곡집 등 장르별 전집을 한데 모아서 엮는 것이 상식이랄 수 있습니다. 어쩐 일인지 이 전집은 이렇게 간명한 방식을 외면하고, 한 장르에 여러 연주자의 녹음이 잡다하게 섞여 있습니다. 가령 9곡의 교향곡을 위하여 6명의 지휘자(연주단체)가 등장하는 것이 한 예입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녹음이든 연주 수준이든 그렇게 들쭉날쭉하게 만들지는 않았으니, 편집자의 능력이 참 대단한 것을 알겠습니다. 이 전집의 1번 CD는 - 여느 전집처럼 - 당연히 교향곡 1번으로 시작합니다만, 마지막 87번 CD에는 작품번호 끝번(Op.138)인 레오노레 서곡 1번이 들어 있고, 베토벤 음악의 최종 종착역이라 할 수 있는 대푸가(Op.133)로 전집의 대미를 장식합니다. 정말 놀라운 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왠만큼 음악을 듣는 사람이라도 CD 몇십장 정도는 갖추고, 매니아라면 장르별 전집까지 여러 종 비교하면서 즐길 터인데, 이제 이런 싸구려 전집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요? 확실히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교향곡·협주곡·피아노소나타·현악사중주 등 소위 베토벤의 걸작품들은 너무 연주나 녹음이 밋밋하여 별다른 감흥이 없다고 인정합니다. 다만 그것들이 '다 들어있다'는 의미 정도 밖에는 없지요. 하지만 이런 장르들은 평소에 많이 들을 수 있는 것이니까 일단 한켠에 밀어 놓고, 여기서는 오직 잘 듣지 않는 것, 듣기 어려운 것들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로 비정형 편성의 실내악 작품들, 수많은 변주곡과 소품들, 수백곡의 리트, 습작과 스케치 등이지요.
베토벤의 음악성·예술성만을 따진다면 역사적으로 검증받은 그의 걸작들로서 이미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 이상은 호사가들의 별난 취향일 뿐이지요. 다만 베토벤 예술의 경지을 넘어서 그의 인간적인 고뇌까지 함께 호흡하고 싶다면 그가 남겨 놓은 모든 자취들을 꼼꼼히 훓어볼 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베토벤은 자신이 완벽하게 성취했다고 인정한 작품에만 공식번호(Opus)를 부여하여 출판하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제대로 만들지 못한 것(습작들), 만들다가 만 것(더 손봐야 할 불완전한 것), 외부적 환경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만든 것(후원자나 권력자의 요청·압력), 그야말로 빵을 위하여 만든 것(국적 불명의 각국 민요에 붙인 리트 따위)들은 그에게 있어 인정하기 싫은 사생아와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 눈에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사생아입니다. 그의 적자(嫡子)들이 세계 각국의 연주회장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웅장한 사운드를 자랑하고 있을 때, 이 사생아들도 음악적으로 이미 새롭게 해석되고,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까지 감동하고자 하는 수많은 매니아들에게 깊은 의미로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시시한 동기'로 작곡된 곡들을 듣다보면, '내가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라고 독백하는 고독한 천재의 번민이 느껴지는 듯 합니다. 그닥 창조력을 집중할 수는 없었겠지만, 작품 하나하나에서 악성(樂聖)의 편린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WoO 작품들은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되, 아담하고 소박한 가운데 슬프도록 아름답습니다.
단지 이런 공명을 얻기 위한 것만으로도 이 전집은 충분히 한가치한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WoO 곡들의 연주가 훨씬 좋아 보이는 것도 - 다른 연주를 그다지 접해보지 못해서 비교 대상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요 - 이 전집에서 버릴 것이 하나도 없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아뭏든 베토벤 전집으로는 대단히 희귀한 경우이고, 아마도 당분간 범위에 있어서 만큼은 이에 필적할만한 물건이 나오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