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 119분
한국, 드라마
원안 강지연
각본 유승희
각색 조혜경, 조영수, 하원준
윤색 신수연, 전용성
감독 김현석
출연 나문희(2017 영평상 여우주연상 수상), 이제훈, 박철민 외 + 손숙, 이대연
한마디로... : 은폐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기로 한 어느 할머니의 용기 있는 선택(....에 관한 얘기이긴 한데 겉으로는 오지랖 민원 민폐 할매의 영어공부&활용기)
<택시운전사>나 <군함도>보다도 흥행할 수 있는 소재라고 생각했다. 국민적인 공분이 훨씬 폭넓고 정공법이 아닌 우회로를 택한 이야기 접근도 참신한데다, 2007년 미 하원 사죄결의안 채택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니 폭발력도 장착했다고. 게다가 내겐 그닥 매력 없던 이제훈이 무척이나 호감 가게 연기했으며 나문희라는 걸출한 노배우가 주연을 맡아 연기력 지원사격도 빵빵. 그런데 3백만이라는 흥행스코어는 주연의 브랜드파워가 아닌 만듦새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었음을 영화를 보고 느꼈다.
왜 눈물샘을 자극하면서도 너무 뻔할까. 마지막 동생의 출현이나 곤경에 처하는 할머니를 돕는다고 굳이 구청 직원이 미국까지 달려와 그것도 난입을 시도하는 등등은 뻔하다 못해 무리하고 어이가 없었다. 꽤 적절하게 배치된 여러 에피소드와 에피소드가 지니는 함의가 선명하게 전달되지 않는 건 둘째치더라도, 할머니의 마지막 연설에서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건 문제가 있다. (클라이막스에서 제작진이 한 것은 약간의 인위적인 위기를 준 것 뿐이고 나머지는 배우들 연기가 다 했다.) 심지어 할머니의 성노예 시절 회상 장면은 모호한데다 재미도 없어서, 진정으로 할머니들의 과거에 깊이 공감을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밋밋했다. 내 비록 너무 리얼한 전달은 가슴 아파 못 보는 사람이긴 해도, 기왕 다룰 거면 제대로 해주지. 요즘 영화들, 쓸데없이 잔인한 장면은 잘도 넣으면서 왜 이런 것은 몸을 사리나...? 1
이런 사실 전달의 아쉬움도 차치한다고 치자. 그래도 시장통 오지라퍼 할머니가 오랜 비밀을 드러내는 결심의 계기조차 오지랖(친구를 위해서라니..)이라는 건 너무해. 할머니가 겪었을 한스러운 인생사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씬은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한탄하는 장면 뿐인데, 문제는 그 장면을 봐도 왜 이 결심이 할머니 '자신을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는 거다. 오히려 그녀를 변화하게하는 힘은 시종일관 친구에 대한 애정으로 보인다. 이렇듯 영화가 주인공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 주변인처럼 만든 것이(결정적인 순간에 '대신 나서줄 자기희생적 영웅'으로 바라본 것이) 이 좋은 이야기의 힘을 잃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주인공을 보여주려면, 시장통 얘기보다 과거가 할머니에게 끼친 영향을 더 많이 다뤘어야 하지 않나? 과거의 트라우마로 누가 손만 대도 몸서리친다는 할머니의 모습을 난 왜 영화에서 말로만 들은 거 같지?
물론, 그런데도 영화는 눈물샘을 자극한다. 가끔 웃기기도 하고 재미도 있고 보는 동안은 크게 무리가 없어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속이 꽉 찬 느낌이 들지 않는다.
소재가 소재이니 만큼, 또 좋은 소재인 만큼, 알맹이가 더 꽉 영글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참 많이 크게 든다.
+) 그리고 영화와 별개로 내가 분노한 지점... 영화의 앞뒤 어디에도 안 보이는 작가들의 이름이었다.
하도 안 나와서 일부러 엔딩크레딧을 끝까지 뒤져 겨우 찾아낸 작가진은 위에 썼듯 저렇게 많았다. 근데 더 기막힌 건 오프닝인가에는 감독이 각색도 겸했다고 떡하니 나온다는 거다. 나는 저 영화 제작진을 하나도 모른다. 저런 크레딧이 나오게 된 사연을 전혀 모른다. 다만 요즘 영화계의 관행을 아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어 화가 난다. 2000년대만 해도 각본과 각색의 이름은 오프닝에 또렷이 나왔다. 그런데 지금은 촬영감독과 피디, 투자자까지 다 나올 동안 작가 이름만 찾아볼 수가 없다. 처음엔 오프닝이더니 점점 엔딩에서도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대놓고 작가를 천대하는 한국영화가 질적으로 망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본다. 투자/배급사들의 시장 안팎 영향력을 제한해서 돈의 논리를 줄여가지 않는 한, 작가와 감독의 위치를 정상화할 방법은 요원해 보인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