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철도999송의 김국환 아저씨가 부른 [타타타]에 이런 가사가 있다.
♪산다는 건 좋은거지
수지 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평생에 옷 한 벌이라니 참 소박하기도 하구나' 싶어서 예전엔 가사가 재치있다고만 생각했다.
인생이 0에서 시작해서 하나 둘 셋 넷..차곡차곡 쌓아올려지고 늘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에.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성공을 떠나서 인간적으로 100을 쌓고 죽을 수 있을거야, 라고 생각할 때에 말이다.
지금은 인생이 그렇게 인심좋은 장사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진법처럼, 0,1,0,-1,0,1........ 마이너스가 되기도 하고 플러스가 되기도 하면서 끝없이 0과 1 사이를 오가는 것 같다.
경제적인 것이든 인간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사람은 어느 순간 어느 계기에 의해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치기도 하고 플러스로 솟구치기도 한다. 1의 고마움에 무뎌질 때면 2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또다른 곤란이나 교만이 아래로 밀어뜨린다. 어쩌면 그 순간의 당사자에게는 -100과 +100만큼의 차이로 느껴질지 몰라도 그것은 감각의 차원일 뿐, 인생의 질적인 면에서 본다면 결국 0의 앞뒤를 오락가락한 것에 불과하다.
내 생각에 사람이란 눈에 띄게 훌륭해지는 법도 몰라볼 만큼 타락하는 법도 없다. 질풍노도를 넘어 가치관을 세운 시점부터는 0에서 1만큼의 차이일 뿐이다. 가끔 그 1을 뛰어넘은 성인들이 나타나긴 할거다. 하지만 보통은, 그 1만큼의 작은 차이를, 자신이라는 세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그 안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만으로도 죽을만큼 괴롭거나 행복하기 때문에.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이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주범이 될 수도 있고, 소중한 가치가 세월을 거쳐 변질될 수도 있다. (기준은 어디까지나 개인으로서의 '나'이다)
결국은 사람이 죽을 지경에서도 살아남는 이유는 단 하나의 무언가 때문이다.
단 하나의 사람, 단 하나의 미련, 단 하나의 희망...
왜 단 하나냐고? 둘이나 셋 있으면 안되냐고?
뭐... 보통, 살아야 할 이유가 많은 사람은 죽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테고.. 반대로 절박한 단 하나가 없다면 다른 이유들도 희미해질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0이라는 것은 감사해야 할 지점이다.
누구나가 출발한 지점이면서 꿈을 꾸는 게 허락된 지점.
세상을 좀 더 알게 되었으며 허탈할지언정 괴롭지는 않은, 그래서 감사할 줄 아는 지점.
그것이 0의 미학이다.
몇년 전,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어온 친구가 드디어 0이 되었다고 목놓아 외친 적이 있다.
"근데 너무 허탈해..."
그렇게 노력하면 10,20, 50도 쌓아 마땅할텐데, 어째서 나는 뼈빠지게 노력해서 겨우 0인가. 힘이 빠질만도 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누구나 그렇게 살 것이다.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다 얻은 것 같은 순간이 있으면 격랑에 휩쓸리는 순간도 있다. 그런 상승과 하락은 물질적이거나 사회적인 잣대로 나타날 수도 있고, 안타깝게도 나 자신의 됨됨이나 학식에도 해당된다. 새로운 기억이 옛기억을 몰아내듯이 우리의 성품이나 지식도 물갈이가 된다. 내면적으로는 교만과 의기소침함이, 외면적으로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기복이 0과 1 사이를 무한반복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죽을 때 옷 한 벌이라도 얻었다면 그게 어디인가?
수지맞은 장사지...^-^
♪산다는 건 좋은거지
수지 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평생에 옷 한 벌이라니 참 소박하기도 하구나' 싶어서 예전엔 가사가 재치있다고만 생각했다.
인생이 0에서 시작해서 하나 둘 셋 넷..차곡차곡 쌓아올려지고 늘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에.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성공을 떠나서 인간적으로 100을 쌓고 죽을 수 있을거야, 라고 생각할 때에 말이다.
지금은 인생이 그렇게 인심좋은 장사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진법처럼, 0,1,0,-1,0,1........ 마이너스가 되기도 하고 플러스가 되기도 하면서 끝없이 0과 1 사이를 오가는 것 같다.
경제적인 것이든 인간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사람은 어느 순간 어느 계기에 의해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치기도 하고 플러스로 솟구치기도 한다. 1의 고마움에 무뎌질 때면 2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또다른 곤란이나 교만이 아래로 밀어뜨린다. 어쩌면 그 순간의 당사자에게는 -100과 +100만큼의 차이로 느껴질지 몰라도 그것은 감각의 차원일 뿐, 인생의 질적인 면에서 본다면 결국 0의 앞뒤를 오락가락한 것에 불과하다.
내 생각에 사람이란 눈에 띄게 훌륭해지는 법도 몰라볼 만큼 타락하는 법도 없다. 질풍노도를 넘어 가치관을 세운 시점부터는 0에서 1만큼의 차이일 뿐이다. 가끔 그 1을 뛰어넘은 성인들이 나타나긴 할거다. 하지만 보통은, 그 1만큼의 작은 차이를, 자신이라는 세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그 안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만으로도 죽을만큼 괴롭거나 행복하기 때문에.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이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주범이 될 수도 있고, 소중한 가치가 세월을 거쳐 변질될 수도 있다. (기준은 어디까지나 개인으로서의 '나'이다)
결국은 사람이 죽을 지경에서도 살아남는 이유는 단 하나의 무언가 때문이다.
단 하나의 사람, 단 하나의 미련, 단 하나의 희망...
왜 단 하나냐고? 둘이나 셋 있으면 안되냐고?
뭐... 보통, 살아야 할 이유가 많은 사람은 죽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테고.. 반대로 절박한 단 하나가 없다면 다른 이유들도 희미해질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0이라는 것은 감사해야 할 지점이다.
누구나가 출발한 지점이면서 꿈을 꾸는 게 허락된 지점.
세상을 좀 더 알게 되었으며 허탈할지언정 괴롭지는 않은, 그래서 감사할 줄 아는 지점.
그것이 0의 미학이다.
몇년 전,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어온 친구가 드디어 0이 되었다고 목놓아 외친 적이 있다.
"근데 너무 허탈해..."
그렇게 노력하면 10,20, 50도 쌓아 마땅할텐데, 어째서 나는 뼈빠지게 노력해서 겨우 0인가. 힘이 빠질만도 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누구나 그렇게 살 것이다.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다 얻은 것 같은 순간이 있으면 격랑에 휩쓸리는 순간도 있다. 그런 상승과 하락은 물질적이거나 사회적인 잣대로 나타날 수도 있고, 안타깝게도 나 자신의 됨됨이나 학식에도 해당된다. 새로운 기억이 옛기억을 몰아내듯이 우리의 성품이나 지식도 물갈이가 된다. 내면적으로는 교만과 의기소침함이, 외면적으로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기복이 0과 1 사이를 무한반복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죽을 때 옷 한 벌이라도 얻었다면 그게 어디인가?
수지맞은 장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