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게으른 책벌레/리뷰라 치고

중력 삐에로

by 와옹 2010. 3. 16.
내가 이름을 기억하는 일본 작가는 손에 꼽는데
그러니까 오싱이나 빙점 이후에
처음 접한 것이 텐도 아라타였고 (영원의 아이)
안 읽어도 알게 되는 미야베 미유키나 히가시노 게이고를 빼면
온다 리쿠 정도를 기억한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
그리고 이사카 고타로를 기억하게 되었다.

러시라이프라는 그의 소설이 집에 있음에도 꿋꿋이 읽지 않다가
최근 추천을 받고 읽은 [중력 삐에로]를 읽었다. 꽤 괜찮았다.
가볍지만 풍부한 울림. 뭐... 깊다고는 말 못하겠고, 풍부하다.
박학다식함을 자랑하는 작가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분은 나름대로 꼭 필요한 요소로 사용하려 노력했으니 패쓰~. ^^
의문의 방화사건을 추적하는 형제 이야긴데
내러티브는 방만하다. 아주 약간, 읽지도 않은 프루스트나 제임스 조이스가 이럴까라는 의문이 들만큼.
산만하지는 않다. 결국 하나하나 다 풀어내니까.
대신에 결코 힘있는 스토리는 아니다. 사건도 조금 밋밋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작가의 생각이 재미있는 소설이다. 전체적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잠깐 내 얘기를 하면...
초등학교 6학년 때 헤세의 [지와 사랑]을 읽고 있으니 누가 물었다. 그 두껍고 빽빽한 책을 어떻게 읽느냐고.

"이렇게나 무슨 할 말이 많은지 궁금하잖아요."

그때의 나는 그랬다. 지금은 흐흐... 편집은 산뜻할수록 좋아용~. (그 시절에 프루스트랑 제임스 조이스를 읽었어야 하는데...!! 대하소설들이랑;;)
어떤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까 하는 건 읽는 도중에 드는 궁금증이고,
기본적으로 책을 집어드는 이유는 작가의 생각이 궁금해서다.
내가 논설문이나 논픽션에 흥미를 못느끼는 것도, 작가만의 재미난 관점을 찾기 어려워서인지 모른다.
판타지/SF를 좋아하는 건 작가만의 철학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고,
그래서 안 읽히는 것도 많은 아이러니한 장르. ^^;;;; 뭐 이래.



여하튼 중력 삐에로에서 이사카 고타로가 말하는 것들,
'정말 심각한 것은 가볍게 전해야 한다'거나 '즐거움이 중력을 없앤다'거나
'어떤 것에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인간의 나쁜 습성'이라거나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믿는 사람은 구원받는다'는 등등등은, 더러 궤변이고 모순인데도 유쾌하다. (읽을 때는 모순이란 생각도 안 든다)

이 소설은 이러한 작가의 시각 위에 여러가지 사건을 얹은 거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 얹은 이야기는 퍼즐처럼 요리조리 연결되어 또다른 의미를 파생한다.
참 머리 좋은 작가다.

역자후기를 보면 이 의미들을 너무 과대해석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 번역가분은 일본소설 번역의 쌍두마차라고 할만큼 유명하건만, 솔직히 이 책을 읽고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시절'이라고 하는 게 나은 초보적인 번역을 '시대'라고 일본식으로 그대로 쓰고
예, 뭐, 응, 웃, 윽, 헉 따위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감탄사를 전부 '에!'라고 통일했는지
어색한 국문이 여기저기 눈에 띄어 조금 역자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
더구나 후기에선 벼라별 의미 부여를 다 하셨단 말이지! 친부살해 모티브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주인공이 중력을 거스르는 삐에로라느니 첫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그런 의미라느니... 흥미로운 해석이지만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려놓으셔서 웃음이 났다. 어째서 네안데르탈인까지 장담하시는데요...^^;;
(그러나 집어든 다음 책도 이 분의 번역일 뿐이고....;;;;;;;;;;;)

걍, 역자에게 책 속의 한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의미를 생각하다 보면 사물은 너무 복잡해진다'고.
생각해보라. 심각할수록 가볍게 전해야 한다는 작가다. 그런 사람이 수많은 의미를 설령 생각했다 해도, 그걸 노리고 썼을 리는 없지않은가?
가볍게 전하려는 이야기는 가볍게 받으면 된다. 거기에 무한상상을 덧붙이는 건 모두의 자유로 남겨두자.
가볍게 읽고 풍부하게 생각하면 그뿐.
중력을 거스르려면 그쯤은 해줘야지.


덧)
책표지엔 '지적인 익살, 절묘한 구성, 의표를 찌르는 유쾌한 반전'이라고 써있다.
지적인 익살엔 동감한다.
하지만 의표를 찌르는 반전은 없다. 처음부터 범인이 뻔히 보이고 마지막 행동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절묘한 구성은... 읽는 이에 따라 다를 듯. 약간 <슬럼독밀리어네어> 같은 면이 있다.
어쨌든 추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