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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팍해요~문화생활

[펌] 역사상의 공길, 그는 광대 중의 광대였다

by 와옹 2007. 10. 19.
왕의남자 DVD를 지른 기념으로...ㅡ.ㅡ 뒷북이지만 좋은 자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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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 우리 음악

   영화 ‘왕의 남자’ 돌아보기
                      역사상의 공길, 그는 광대 중의 광대였다
  
                                                                  손태도(문화재 전문위원)

  영화 ‘왕의 남자’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고 한국 영화사상 최대 관객 동원의 기록을 달성하며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먼저 광대 연구가의 한 사람으로 그 동안 전통 공연물 문화를 바탕으로 영화 ‘왕의 남자’가 이룬 업적들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이제는 영화의 흥행이 어느 정도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기에, 그 동안 이 영화에서 잘못되었다고 여긴 것들을 말할 때도 되지 않았나 한다.

       정치적으로 연산군을 이긴 공길의 화극 공연

  연산군 11년(1505) 그 해의 마지막날인 섣달 그믐날 무렵인 12월 29일에 공길은 임금 앞에서,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아무리 곡식이 창고에 가득한들 그 쌀을 먹을 수 있겠는가?’란 화극 공연을 하게 된다. 이것은 궁궐에서 매년 있었던 연말 나례희의 한 행사였다.

  고려 시대 매해 새해가 오기 전에 잡귀잡신을 쫓는 중국의 연말 나례(儺禮) 의식이 들어온 이래, 우리나라에서도 매년 궁궐에서는 한 해의 마지막날인 섣달 그믐날에 잡귀잡신들을 몰아내는 구나(驅儺) 의식도 행하고, 연말 분위기 속에 가무백희도 즐기는 관례가 성립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연말 나례희 때의 가무백희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광대의 화극 공연이었다. 임금은 궁궐에 있어 궐밖의 사정을 잘 모르기에 매년 연말 나례희 때 광대들이 시정(市井)의 여러 가지 일들을 연극으로 꾸며 공연하는 것이다. 이것이 화극(話劇) 공연의 전통이다.

  이러한 화극은 오늘날의 개그(gag)와 비슷한데, 대체로 광대 한 명이 주동이 되어 간단한 재담과 흉내내기를 통해 임금을 웃기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비록 광대의 놀이이나 세상의 여러 일들을 알려 임금의 정치에 도움을 준다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기에, 이 화극 공연들이야말로 연말 나례희 때 가장 중요한 공연물이 되었다.

  영화에서는 공길 일행이 우연히 궁궐에 들어가 공연을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상 공길은 이러한 매년 있었던 연말 나례희 때 공연을 한 것이다.
한편 이 화극 공연으로 공길은 매를 맞고 먼 곳으로 유배되는 중벌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공길의 중벌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사전에 예상된 것이었다. 이러한 공길의 화극 공연이 있기 몇 년 전에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산군 5년 역시 연말 나례희가 행해지던 12월 30일에 공결(孔潔)이란 광대가, ‘벼를 김매는데 오정이 되니/ 벼포기 아래로 땀이 떨어지누나./ 그 누가 알아주랴, 소반 위의 쌀밥이/ 한 알, 두 알 모두가 신고(辛苦)인 것을.’이란 이신(李紳)의 <민농시>(憫農詩)를 외우고, 삼강령(三綱領), 팔조목(八條目) 등의 말을 하자, 임금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끝내 형장 60대로 때리고 역졸(驛卒)에 소속시켰다. 광대의 화극 공연은 처음부터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기에, 그 내용에 대해서는 불문에 붙이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고려·조선이래 처음으로 광대가 화극 공연을 하다 벌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더구나 같은 공씨(孔氏) 성을 가진 공길(孔吉)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목숨을 거는 중벌을 각오하고, ‘임금은 임금다워야 한다.’는 화극 공연을 한 공길은, 분명한 정치적 목적을 갖고 한 것이 틀림없다.

  이 공연이 있는 다음 해 8월에 연산군은 중종 반정으로 폐위되고 만다. 그러므로 폐위 바로 전의 연말 나례희 때의, ‘임금은 임금다워야 한다.’는 화극 공연은 폭군 연산군에 대한 마지막 경고였다. 그것은 공길 개인의 계획일 수도 있고, 중중 반정을 준비하고 있던 집단의 계획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러한 마지막 경고를 광대인 공길이 목숨을 걸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공길이야말로 광대 중의 광대였다.

        공길은 악공 계통의 사람

  영화 ‘왕의 남자’에서 공길 일행은 민간의 떠돌이 공연 단체였는데 어쩌다 궁궐에 까지 들어가 공연을 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고려·조선 시대 이러한 화극과 같은 광대 역할을 한 사람들은 주로 악공 집단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조선 시대 보통법·현행법으로 사용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를 비롯한 여러 문헌들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무릇 악공들이 잡극(雜劇)을 만들어 하되, 역대 제왕, 후비(后妃), 충신, 열사, 선성(先聖), 선현(先賢)의 신상(神像)으로 장식하여 희롱하면 장 100이다.      『대명률직해』(1395), 형률, 잡범

  악공을 시켜 북, 피리, 필율(篳篥)을 연주하게 하였다.......음악 연주가 끝나자 여러 악공들이 북을 치며 광대담(廣大談)과 창우(倡優)의 여러 놀음을 하니       신유한, <해유록>(1718)

  이들 중에는 악사들 - 배우이기도 했다 -도 있었다......연기자는 사실상 한 명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나 둘 가량의 다른 사람은 그저 들러리로 참가해 밝은 별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그림자 역할을 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퍼시벌 로웰,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1883~1884)


  악공이 광대의 역할도 하는 중국의 『대명률』 등의 규정을 받아들여 우리나라에서도 악공이 화극 등을 하는 광대의 구실도 하게 하였고, 이러한 전통은 근대 무렵까지도 이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공길은 원래 관에 소속된 악공 계통의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조선 시대의 연말 나례희 때는 경기도 지역까지의 광대들이 동원되었으므로 그는 궁중 소속 악공이거나 경기도 지역의 관아에 속해 있었던 악공 계통의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공길의 후손

  악공·광대였던 공길의 후손을 찾는 것은 정말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악공·광대이기에 오히려 그의 후손을 찾을 여지가 있다. 다음처럼 악공은 특수 기능을 지닌 천민이기에, 고려 시대부터 이미 세습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악공으로서 세 아들 또는 네 아들이 있는 자는 그 한 아들이 아버지의 직업을 계승한다.      『고려사』, 선거, 문종 7년(1053)

  그러므로 공길의 후손들이 단절되지만 않았다면,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공씨성을 가진 채 국악 영역에서 활동할 여지가 있다. 지금까지의 조사로 보아 국악계에서 공씨성을 가진 유일한 국악인 집안은 공창식(1887~1936), 공기남, 공대일(1910~1990), 공옥진(1931년생) 등의 판소리인들을 배출한 전남 화순 일대의 공씨들이다. 이 중 공옥진은 공창식의 손녀이고, 공대일의 딸로 판소리뿐 아니라 병신춤으로도 유명하며 현재도 할동 중에 있다.

  이들 전남 화순 일대의 공씨들이 공길의 후손이라는 직접적 자료는 없다. 그러나 악공은 신분을 세습해 내려 왔기에 연산군 때 먼 곳으로 유배된 공길의 후손들이 아직도 살아있다면, 사실상 먼 지방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전남 화순 일대에서 여전히 대를 이은 국악인들로 남아 있을 여지는 여전히 있다 할 것이다.

           남사당패는 1900년 전후 무렵에 생긴 단체

  영화 ‘왕의 남자’에서 공길 일행은 남사당 집단과 비슷한 모습으로 설정된 면이 있다. 그러나 남사당패가 성립된 것은 사당패가 없어질 무렵인 1900년대 전후 무렵이다. 사당패 집단은 여자인 사당들과 남자인 거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근대에 접어든 1900년 무렵 정도에 오면 여자인 사당들을 더 이상 조달할 수 없어 거사들이 나이 어린 남자아이들을 여자처럼 꾸며 말 그대로 ‘남사당’으로 만들어 다녔다. 이것이 남사당패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공길 일행을 남사당패처럼 설정하고 영화 곳곳에 남색적(男色的) 요소들을 설정한 것은 잘못된 것으로, 이는 단순히 영화적 흥미 정도로 그쳐야만 할 일이다.


   * 그림들이 있는 원문은 국악누리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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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wangdae.com 에서 퍼옴

이런 기록을 보면 옛사람들이 더 개방적이라니까...
오히려 요즘은 누가 대통령 앞에서 저런 공연을 하느냐구?
공연 안해도 다 안다구요? 기자실도 막는 세상에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