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BL(원작)의 선입견에 갇히기 아까운 수작
내가 이 드라마 리뷰를 쓸 줄이야... ㅋㅋ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친구한테 "야 이거 재밌다는데 난 왤케 안 봐지니" 토로했던,
그리하여 16년 전 과거 훌쩍 건너뛰고 현재 이야기만 쭉 훑었는데 음 그래 괜찮군, 했던 드라마.
그런데 혹시나 싶어 돌려본 과거 이야기가 백미였다는 걸 깨닫고 결국 끝까지 다시 보고 만 드라마.
넹. <진정령>입니다.
이 드라마 보기 전에 나는 더 긴 <천계지백사전설>도 보았고 <호란전>도 재미나게 보았다.
근데 리뷰 같은 건 만사 귀찮아서 쓸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이 리뷰를 쓴다는 건,
그만큼 열광할 포인트가 있는 드라마란 뜻.
갠적으로 16년 전과 후로 나뉘는 구성이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게,
초반 1,2화에서 (취향이 아닌데도) 꽤 흥미로웠던 이야기가 가다 뚝 끊기고 과거로 돌아가더니, 과거에 실컷 몰입하다보면 갑자기 뚝하고 현재로 와버려, 여운은커녕 맨앞에 무슨 내용 있었더라 더듬게 만들기 때문.
그 점만 빼면 꼼꼼한 설정이나 설득력 있는 세계관, 메시지 등이 참 괜찮은 작품이다.
이 드라마는 원작이 BL 소설이라는 걸로 유명한데, 거기에 초점을 맞추기엔 여러모로 아쉽다.
BL은커녕 브로맨스 깜도 안 되는 아주 건전한 우정물인데다, 그들의 우정보다 더 큰 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
선과 악, 은혜와 원한, '어쩔 수 없었던' 각자의 입장들,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정도와 사도... 그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남잠(남망기, 함광군)이 속한 고소 남씨의 가훈이(정확히는 3000개의 규칙 중 메인이라 할만한 가훈이) 규칙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바르게 정화시키라는 것인데 비해, 위영(위무선, 이릉노조)이 속한 운몽 강씨의 가훈은 '안 되는 걸 알아도 하라'인 것도 같은 맥락의 대비. 주인공들 캐릭터부터 티나게 대비시키는 전형적 설정들은, 그런데 너무 이야기와 잘 어울린다. + 배우들 연기까지도.
사실, 저런 호리호리한 아이돌 외모에 연기력을 기대하진 않잖아요? 실제로 초반부 둘의 연기는 좀 아슬아슬해서, 중반부에 검은 애를 연기한 샤오잔(초전)의 포텐이 터지고 후반부에 하얀 애 왕이보(왕일박)의 매력이 터질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둘이 정말로 의외로 연기를 잘함! 브로맨스 부분이 -의도적인 장면들이 난무하는데도- 두드러지지 않는 것은 그들의 연기에서 소년미가 풀풀 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청년인데 얘네들 연기는 소년물이다. 그러니 소년들의 우정에서 좀 낯간지러운 말이 나온대도 설레긴커녕 엄마미소가 나올 뿐. 아하하... 나랑 달리 여기서 설렌 사람이 많아 보이지만--;;; 나에겐 <진혼>보다도 브로맨스가 안 느껴진 작품. 근데 그게 풋풋해서 좋았다.
드라마가 돈도 엄청 들인 게, 아름다운 화면이 많이 나온다. 광활한 풍광을 드론촬영 같은 걸로 쫙쫙 잡아주는 것은 기본이고, 오대문파의 주요공간들이 특색에 맞게 예쁘게 나온다. 전투씬도 무술이 재밌진 않은데 스케일은 작지 않다. 동네 싸움 규모이던 <진혼>을 생각하면 정말 돈 많이 들인 티 팍팍! 게다가 줄기차게 나오는 피리와 금 연주 OST가 또 공을 들여서, 다 보고 나면 귓가에 피리 소리가 계속 들리는 부작용이 생긴다.
33화에 나오는 이 장면이 드라마의 첫씬인데, 벼랑으로 떨어지는 걸 보며 또 <랑야방>이냐 싶었고ㅋㅋ 느닷없는 열연에도 무덤덤했다. 근데 16년 전 과거를 쭉 훑고 다시 이 장면에 이르렀을 때... 난 저 심정에 너무 공감해버린 거지ㅠㅠ 아 진짜, 위무선의 일생은 억울하고 처절한 사면초가여.. 사람 괴롭히는 것도 쪽수로 밀어붙여 마녀사냥하는데, 중국에서 팽당하면 찍소리도 못하고 죽겠구나 싶더라. 그 심정을 샤오잔(위무선 역)이 넘 적절하게 표현해낸다.
나같이 과거 얘기가 재미없어서 2회에서 33회로 건너뛰려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꾹 참고 계속 보기를. 이 드라마의 백미는 33회까지다. 그후는 과거의 억울함을 하나하나 풀어내는 과정으로, 감동적이지만 말이 너무 많다.
후반부는 던져놓은 떡밥과 인물들을 일일이 회수하는데, 내내 잠잠하던 악역들의 사연이 뭉텅이 뭉텅이로 풀리는 부분은 (아무리 재밌는 사연들이고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해도) 좀 산만하고 지루하다. 좀비 느낌 나는 괴뢰들이 자꾸 나오는 것도 싫고..;;; 워낙 위무선의 사연만으로도 바빠서 악당 얘기까지 같이 풀기 어려웠겠지만, 이런 구성 한드라면 절대 없을 중드의 특성ㅎㅎ.
위무선의 포텐이 터지는 부분은 중반부 이릉노조가 되고부터다. (흑화는 아니니 진정하시고...)
사악한 기운을 언뜻언뜻 비치는 연기가 매력적임.
16년 지나고 너무 득도하셔서 원래 캐릭으로 돌아가버리는데, 이해는 충분히 가지만, 캐릭터의 매력은 더이상 확장되지 못한다.
반면 주구장창 포텐 터질 일이 없는 남망기는 왜 후반부에 매력적인 걸까?!
과거에 비해 미세한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기도 하고, 말보다 행동으로 말하는 캐릭터답게 위무선에 대한 반응속도가 빨라진다. 건드리지마 내가 보호한다! 삘로 바로바로 반응하는데.. 그 실루엣이 또 근사하다는 거. 남망기의 말액(머리띠)이 어울려 보이기 시작하면 시나브로 그의 꼿꼿한 자세와 날렵한 움직임에 넘어가게 될 거라고 보장함.
제목에 <진정령>이 무협과 선협의 만남이라고 썼듯이, 이 드라마는 날고 쏘는 신선물(선협)인데도 무협의 느낌을 풍긴다. 남씨, 강씨, 금씨, 섭씨, 온씨의 5대문파 파벌싸움에서 은원이 얽히는 것도 그렇고, 도 닦는 선문의 수행자라는 설정도 신선이 아닌 무협고수들의 이야기로 보이게 한다. 비슷한 설정의 다른 선협물들에 꼭 나오는 선계와 마계 대신에, 무협에서 즐겨 쓰는 정도와 사도(마도)를 구분한다. 인간 이외의 부류가(만들어진 괴뢰 빼고) 나오지 않으며 도술을 무술처럼 취급한다는 점에서 <진정령>은 비슷한 선문제자들이 나오는 <화천골>과 전혀 다른 느낌이 되었다. 그럼 그냥 무협이 아니냐? 할 수도 없는 게, 영험한 무기나 무공 하나를 가지려고 온 문파가 달려드는 무협물에 비해 여기선 영기 하나둘은 기본으로 갖추고~ 악령 비슷한 걸 부리는 사악한 돌멩이(는 아니고 철쪼가리..)를 가지려고 난리다. 무협과 닮았지만 태생은 선협이다. <진정령>은 그 둘을 조화롭게 넘나들며 소년(아니 청년)들의 우정과 신념을 괜찮게 그려낸다. 선과 악, 강자와 약자가 뒤바뀌는 상황에서 계속 따르던 것을 따라야할지, 모두가 아니라는 길을 홀로 걸어갈지, 명분 있는 살인과 사리사욕의 살인은 과연 다른 것인지 그 구분은 누가 어떻게 할 건지를 끝없이 묻는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끝없이 던져야 할 이 질문은 질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진정령>은,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수의 길을 가더라도, 옳고 그름을 분별할 잣대는 '우리'나 '다수' 또는 '이익'이 아닌 '인간애'임을 꽤 괜찮게 보여준다.
명작까진 몰라도 BL원작이라는 선입견에 가려지긴 너무 아까운 수작.
붐이 일어난 것들엔 다 이유가 있음을 보여주는 드라마.
일부 아쉬움을 표하는 CG도 이 정도면 수준급인(너무 기대가 없나?), 여기저기 고퀄리티인 드라마.
최근의 중드 가운데 기꺼이 추천할 만한 <진정령>.
아직 안 본 분들은 재밌게 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