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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팍해요~문화생활/공연.예술

니나가와 유키오의 [무사시]를 보다

by 와옹 2014. 3. 24.

공연일시  2014.3.22(토) 2:00 공연 / LG아트센터 1층 중앙 십몇열 
각본  이노우에 히사시
연출  니나가와 유키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로 니나가와 유키오의 연극을 처음 접하고, 내가 또 언제 이 분 연극을 보겠나 했는데 2년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그것도, 내가 언제 이 사람 연기를 보겠나 했던 후지와라 타츠야 내한이라니!

후지와라 햄릿을 유툽에서 보고 그의 연극 연기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데, 막상 무사시 예매를 하려니까 이런 저런 이유로 포기가 되더라. 근데 놀랍게도 홍차양이 이 연극 얘기를 꺼내서 길양과 셋이서 덜컥 예매에 동참~! 인연이 닿으려면 어떻게든 보게 되는구나~ 좋아라하며 지난 토요일에 보고 왔다. 

1막이 80분 2막이 70분이라고 했던 것 같다. 중간에 20분 쉬고...
1막을 워낙 감탄하며 보아서 주제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2막은 덜 재미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각본과 연출이 다 마음에 쏙 들었다. 특히 연출은! 아아... 70 넘어 만든 극이 이토록 신선하다니요. 니나가와 할아버지는 천재가 틀림없다며, 웃음이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순식간에 웃음으로 전복시키는 그 연출력에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이야기는 무겐노(夢幻能)의 형식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낯선 곳을 지나던 여행자가 그곳에 얽힌 어떤 이의 사연을 듣게 되는데 어쩌구저쩌구...하는 옛이야기 형식. 자세히 말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요정도만. 비록 자막 DVD도 없이 막 내린 공연이지만 일본판 DVD는 있으니깐요.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코지로의 대결은 일본에서는 유명한 이야기라고 한다.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로 유명해진 그 대결은, 지형지물과 날씨, 그리고 상대의 심리까지 이용한 전략가 무사시의 명성을 높이고 그저 혈기와 실력뿐이었던 미숙한 청춘 코지로를 스러지게 했다나. 그리고 이 극은 그로부터 6년 후, 코지로가 살아서 무사시에게 재도전한다는 가상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까지 말하면 바람의 검심 같은 검객물일 것 같지만? <무사시>는 이 둘의 재대결이 자꾸만 방해받게 되는 사흘간의 이야기이다. 보련사라는 작은 절의 낙성식에 참석한 무사시는 코지로의 도전장을 받게 되고, 스님들과 후원자들은 이를 막으려 한다. 공교롭게도 후원자 중 한명인 오토메가 아버지를 잃는 사건이 벌어지고 복수혈전(?)과 대화해의 설법, 출생의 비밀까지 사건이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그 결과, 대결이 불가능해진 무사시와 코지로... 무사시는 여기에 모종의 음모가 있다 여기고 코지로와의 대결을 앞당기고, 그 순간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다. (이하 스포가 되니 화이트 처리) 목숨을 소홀히 한 탓에 목숨의 소중함을 알려야 성불할 수 있는 망자들이 꾸민 사흘간의 연극, 검으로 출세하려는 코지로와 검으로 인격을 완성하려는 무사시 모두 어리석다 나무라는 주제의식. '아깝다... 살아있을 때는 몰랐던 삶의 하나하나가 아깝다'는 대사를 쓰고 이듬해 작고한 극작가의 삶은 아이러니하고, 낯선 곳에서 영혼의 사연을 듣고 한을 풀어준다는 무겐노의 형식을 따르되 영혼이 산 사람을 교화시키려고 연극을 꾸미고 마지막 선택을 호소한다는 약간의 변형은 유쾌했다. 노(能)의 무대처럼 보이게 만든 절의 모습과, 중간중간 삽입되는 노와 교겐(狂言)의 내용이 형식적으로는 일탈의 웃음을 주고 내용적으로는 절묘하게 공통점을 가지는 것도 재미있었다. 

 좌코지로 우무사시

다만 이 연극, <무사시>라는 타이틀이 주는 기대감-검객물 or 주인공의 활약-을 충족시켜주진 못한다. 
초연 때 오구리 슌이 어떻게 주연도 아닌 배역을 맡았나 했더니, 원톱이 아닌 무사시&코지로 투톱 주연이었다는! 
또한 두 사람이 계속해서 뭔가에 휘말리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갈등이 깊어진다거나 뭔가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거나 멋진 행동을 보여주는 순간이 없어서, 주인공의 무엇을 기대하고 본다면 상당히 시시한 이야기다. 그 둘의 마지막 선택은 사실 설득력이 없었어... 유일한 설득력이라면 '착한 애들이구나' 싶은 것? 이건 오히려 '그랜드 호텔' 류의 다주인공 드라마에 가깝다. 그렇다고 제목이 무사시가 아닌 '보련사'였으면 관객이 안 들었겠지? 딜레마로구나.. 제목이 무사시인 탓에 연극에 대한 만족감이 깎이는 것도 사실이니.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 또 볼 일이 있을까 싶은 후지와라 타츠야의 연기를 그다지 만끽하지 못했다는 거다! 오죽하면 가장 좋았던 무사시의 연기를 '나 여기 있소~하고 항상 내뿜는 존재감'이라고 말할 정도로... 무사시는... 극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다. 쳇.
하지만 무대 위에서 온몸으로 스탠바이하고 있는 그의 긴장감은 역시 내가 좋아하는 움직임. 당장이라도 대화에 끼어들 태세로 매순간 집중한다는 것은 감탄스럽거등. 이 배우에게 비호감이었던 길양이 슬로우 액션씬에서 무사시가 진짜 싸우는 것처럼 보여 반했다고 할만큼, 날렵한 움직임에서나 멈춘 자세에서나 느린 움직임에서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 것이 후지와라군의 장기. 그런 책임감 넘치는(?) 움직임이 나는 좋더라. (그런 게 대단스럽게 표현된 극은 아니지만..)

미조바타 준페이는 최근에 보다 만 <실연쇼콜라티에>에 나온 배우로, 꽃돌이 콘테스트 출신이란다. 무척 분발했고 잘 했는데 도중에 간간이 목이 쉬어서 안타까웠다. 무사시보다 대사량이 더 많은데 대부분이 격하게 소리지르는 투라 힘들겠다 싶었다. 아무렴, 니나가와 연극에서 목소리 쉬는 배우가 하나는 나와야지, 당연하지.
스즈키 안은 생각보다 연기를 시원시원하게 잘하더라. 안심하고 볼 수 있는 배우였다. 니나가와 극에 자주 출연하는 덴 다 이유가 있었어... 영화,드라마보다 연극이 더 어울리는 것 같은 여배우. 
문어 연기를 아주 리얼하게 보여준 시라이시 카요코 씨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주역 요시다 코타로 씨, 일드에서 자주 보는 다쿠앙 대사 역의 무사카 나오마사 씨도 안정된 노련함으로 극을 이끌어갔다. 그래... 이 극을 이끈 건 이분들과 코지로다! 무사시는 중심만 잡아줄 뿐 결코 극을 끌고가지 않아! 라는 불평도 해보지만... 그래도 이 극은 그 빼어난 유머감각 하나로 다 용서되는 정말 재미난 소동극이요 코미디였다. 이런 여유로운 개그라니... 흔한 클리셰를 폭소로 만드는 연출력이라니... 나는 그저 멋지다를 외칠 뿐이다......


간결하고도 인상적인 무대활용에 대해 말을 못했네. 움직이는 나무들 사이로 등장하는 절의 세트는 마치 숲을 지나 절에 이르는 느낌도 주면서 (이야기적으로 꿰맞추면) 공간을 재편성하는 의미도 갖는다. 커다란 해와 달, 달을 가리며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실제로 흔든다 ㅎㅎㅎ)은 극의 몰입에 효과적으로 기여한다. 6년의 한을 다다다다 뱉어내는 쪼잔한 코지로의 캐릭터나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다소 치사하게 구는 무사시의 캐릭터도 재미있었고, 음악도 극의 분위기를 한층 돋워주었다. 조명은 무척 자연스러웠고... 하여간 하나하나가 다 조화로웠다. (그 조화를 깬 관객 하나가 있었는데... 환호를 넘어서 악을 쓰기에 난 119 출동하나 했잖아... 두 주인공이 객석을 지날 때 잘생겼다고 외치는 걸 보곤 정말 부끄러웠다. 장시간 열연하는 배우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고작 외모 칭찬이라니... 못생겨서 한맺힌 배우들도 아니고... 우리 말이라 못 알아들었겠지만, 그 돌발행동 하나로 커튼콜을 기대할 수 없는 분위기가 싸-하게 형성되었다는... 내가 배우래도 커튼콜 의욕이 사라졌을 거야. 관객도 일부러 환호를 자제하는 듯했는 걸. 나도 그랬고... 평소라면 와와-! 즐겁게 소리쳐줬을 텐데. 여하튼 관극 매너, 중요하다. 예의를 지킵시다... 배우들이 행복할 수 있게 해주자고요! 자기만족 말고.)

캐스트를 보시려면 펼쳐주세요.

오랜만의 즐거운 문화생활.

"그래, 이렇게 신선한 즐거움을 줘야 연극이지. 이야기지. 예술이지...!" 라는 기분.
즐거웠다. ^^


+덧) 다쿠앙 대사가 단무지 개발보급자라시네. 그 다꾸앙이 그 다꾸앙... 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