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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책벌레/책갈피

따귀 맞기

by 와옹 2013. 12. 6.

특별히 맞춘 운명이
스스로의 속도와 주기로 찾아온다.
호된 따귀 한 대가 이번에도 찾아왔다.

그러나 괜찮다.
삶은 원래 그런 걸.
얼추 올 때가 된 따귀였고
살짝 피하는 데 실패했을 뿐이다.

운명은 거의 표적을 맞춘다.
으스대던 얼굴이 한 방 먹으니
팡,하고 큰 소리가 난 것뿐
치명적일 정도는 아니다.
인간은 편리하게 만들어졌으니
자, 추스르고 일어나라.

호수 물결은 잔잔하고 먼 산들은 눈에 덮였다.
햇볕이 따사롭고 새들이 지저귄다.
왜 이리 호된 따귀를 맞아야 했던지
한 번 짚어볼 필요야 있겠지.

운명은 오늘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가끔 놀리고 호되게 때리겠지.
그러나 맞으며 조금씩 영리해지지.
아직은 두들겨 맞을 일이 한참 남아 있고
어느 날 결정적인 타격이 날아오리라.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에리히 케스트너 [따귀 맞기]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생각하라>라는 에리히 케스트너 평전을 읽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마주보기>라는 제목의 시집으로 대히트를 쳤던 그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 [따귀 맞기]라는 저 시도 아마, 거기에 실렸던 시일 거다. 하여간 저런 톤이 어려서부터 느무느무 좋았다.
케스트너는 내 어린 시절에 큰 영향을 준 작가 중 한 명이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화를 쓴 작가이다.
어린 나이에 도대체 왜 그 무수한 동화를 제치고 케스트너의 <하늘을 나는 교실>과 린드그렌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이 그리도 좋았는지 모른다. ...근데 <삶을 사랑하고...> 저 책에서 말하는 웃는 모랄리스트[각주:1](케스트너와 몽테뉴를 대표적으로 꼽는)가 딱 나인 걸로 보아, 나의 어떤 기질이 케스트너의 어린이책 답지 않은 통찰 가득한 작품을 읽다 벌떡 눈을 뜬 것 같다. 그런 작가에게 매료되는 어린이는 이런 모랄리스트가 되나보다. 그냥 그런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났다.

그의 시와 동화들이 나는 너무 좋다. 심각하다고 소문난 <파비안>조차 희화된 이야기라(고 케스트너는 주장한다)니 그것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참... 즐겁고 씁쓸하니 행복하고 좋다. 후후훗.

  

  1. 도덕관념을 갖고 있으나 자기동일성이 없고 언행이 일치되지 않으며, 자신 역시 어리석과 추함을 알아 세상을 비웃는 것이 곧 자기자신도 비웃는 꼴인 자들. 그들의 웃음은 쓴웃음이며, 그렇다고 순수하지도 심각하지도 우아하지도 저속하지도 고급도 저급도 아닌 몽땅 다 산뜻하게 뒤섞인 웃음이다. ..라고 평전의 저자 박홍규는 정의하고 싶어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