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다 봤다! 한드를 이렇게 단기간에 달리기는 오랜만~. 보면서 이런 수작이 숨어있었다니, 기뻤고 왜 시청률이 안 나왔는지도 짐작이 갔다. 40대 주부를 시청자 평균으로 잡았을 때, 초반 변호사들의 대화는 너무 어렵다. 하지만 막상 뜯어보면 별로 전문적일 것도 없는 내용이라는 거.. 전문직 드라마를 기대한 젊은층이라면 실망했을 수도. 이 드라마는 전문직 세계에서 일어나는 얘기지만 전문직 드라마는 아니다. 그런데 제목은 '변호사들'. 왠지 법정드라마의 인상을 준다.
주인공들이 변호사라는 것은 드라마 전개상 굉장히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정드라마의 선입견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것과 초반 변호사들의 딱딱한 대화는 마이너스 요인이었을 것 같다. 더구나 이 드라마는 첫회부터 봐야 제맛인데, 1회의 전반부가 쫌 전형적이라는 거. 뻔한 배신과 복수가 될듯한 느낌을 팍팍 주는 바람에 초반 몰입이 쉽지 않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전형성을 피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폐인의 출발)
1. 닥치고 연애물
이 드라마는 어떤 드라마냐! 이게 중요한데... 한마디로 사랑 얘기다. 딴 거 볼 거 없구 주인공들한테 감정이입하면 된다.
특히, 김상경의 서정호 변호사(서변) 역할에 올인하면 재미나다는. ㅋㅋ 아웅 멋있어~ 솔직히 데리고 살기엔 속터질지도. '괜찮아 괜찮아'하다가 어느날 변사체로 발견되도 이상하지 않은 남자니까...-_-; 불안해서 같이 살겠냐구?! (서변 부인도 이해가 가..) 하지만 드라마 속 주인공으로는 아주아주 멋지시다능~ 뾰로롱~ 무뚝뚝하고 거칠고 은근 자상하고 결벽증이다 싶을만큼 정의롭고 도덕적인, 검사 정신을 지닌 변호사. 버럭! 연기가 넘 자연스럽다~. (귀엽기까지) 서정호라는 인물도 멋있지만 김상경이 연기해서 더 빛을 발한 듯! 팬 됐어요~ *^^*
여주인공 김주희 역의 정혜영... 사실, 정혜영 답답해서 이 드라마 안본 사람도 꽤 있을 거 같은데(저요!), 그게 또 보다보니깐 아니더란 말이쥐.. 연기를 참 잘한다. 그 답답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존재감 확실!!! 공감대까지 이끌어내니 정말 놀랍다. 너무 착해서 사랑스러운 여자. 있는듯 없는듯 편안한 공기같은 존재. 이런 어려운 인물을 창조해낸 작가와 연출가, 배우에게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캐릭터다. 하지만 여주인공으로서는 캐릭터 자체가 수동적이고 약한 것도 사실.
이 둘의 보일듯 말듯한 사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14화.. 감정에 겨워 주희를 안고.
서정호 "이거 큰일이네..." 김주희 "(눈물 그렁그렁) 그런 거 같아요..."
극중 한고은의 대사를 빌면, '급수를 매길 수 없는 이상한 불륜' 커플. 쵝오!
악역 윤석기를 연기한 김성수... 이유 없이 비호감이었던 배우... 그러나! 아이고 연기 제대로 해주시고~ 특유의 단정하면서도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역할에 딱~ "니가 한번 구해봐. 사랑한다면"하고 김상경한테 들이대시는 장면부터 호감 모드~.
이 두 남자의 사랑법과 연기대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므흣한 은총이랄까~. 둘이 나오는 장면의 긴장감이 좋고, 대사가 또 죽인다. 크흐...! 정성주 작가님 멋쟁이!! 서변의 "기철아~" "형제님" 대사를 만들어내셨다는 PD님도 멋쟁이!! 요즘 드라마가 직설적이고 즉각적인 대사 일색인데, [변호사들]의 대사들은 한번 생각하고 말하는 정제된 언어들이다. 그래서 더 긴장감이 있고 의미심장하다. 그걸 또 멋지게 대사빨 날려주시니깐~. 우후후.
추상미의 송변(호사) 역할도 독특하다. 멜로라인이 없는(과거엔 몰라도) 이성친구 역할인데, 당시 추상미의 인지도에 비하면 맥없는 조연이지만 드라마 전체적으로는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인물이다. 추상미(의 연기력)였기에 후반부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지만, 또 추상미였기 때문에 -배우의 활용면에서- 기대에 못미치는 배역이기도 했다.
이건 양하영을 연기한 한고은도 마찬가지. 그래도 한고은은 여성캐릭터 가운데 가장 뚜렷하고 강렬하다. 캐스팅 자체는 적역. 추상미가 김상경의 친구라면, 한고은은 정혜영의 친구. 재미있는 건 이 두 여인이 정혜영과 김상경, 김성수를 둘러싸고 미묘한 질투와 의리를 보여준다는 것. 그래서 더 멋있는 두 여자다!
그러나 닥치고 연애물로 보기엔 결말이 쫌 찝찝하다. 해피엔딩이 아니라 해도, 상황으로 맺어지거나 마음으로 연결되거나 어느 한쪽에 정착하는 맛이 있어야 연애물의 결말다운데, 이건 뭐 사랑의 작대기만 있지 뭐가 어찌된 건지.. 멜로드라마로서는 좀 실망스러울지도?
2. 전문직+장르물
전문직드라마의 전형이라 하면(특히 미드), 일터에서 사건이 계속 벌어지고 해결하는 언저리에서 개인사가 벌어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법정 싸움은 커녕 법정 장면이라곤 두번 나오고 땡인 [변호사들]은 전혀~ 전문직 드라마답지 않다. 다양한 음모와 은폐가 변호사라는 사람들을 둘러싸고 그럴 듯하게 벌어지니까, 변호사 세계를 그리고는 있지만 전문직 드라마는 아니다... 음, 애매모호하네. 변호사니까 맞닥뜨릴 법한 이야기와 일반인이 휘말릴 수 있을 법한 사건이 교묘히 맞물리고, 모든 인물이 얼키고 설키며 빚어지는 약간의 수수께끼와 수사물 분위기에서 장르물의 향기가 나긴 하는데...
장르물이란 본디 규칙에 충실할 수록 맛이 나는 법! 그러나 이 드라마는 장르의 규칙을 따르기 보다는 피해가는 편이다. 뺏고 뺏기는 삼각관계가 아니라 서로 이해하는 삼각관계.. 가해자가 없는, 서로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 불륜구도.. 권선징악의 선악구도에서 탈피한, 완벽한 악인도 완벽한 선인도 없다는 시각..(특히 김상경의 정의감을 도덕적 우위로 바라본 것이 좋았다.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되묻게 되는. 그러나 또 영웅적인) 모두가 상처받고 모두가 맺어지는, 또 모두가 이해하고 모두가 맺어지지 못하는 결말.. 장르물의 관점에서 본다면, 뭐 하나 시원하게 해결되는 게 없다. 싸그리 죽거나, 정의가 구현되거나, 거대악당을 처단하거나, 미인을 얻거나... 어느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막판에는 반전과 여운을 남기며 "혹시 이거 시즌2를 염두에 두고 제작한 거 아냐?"란 의구심을 일으키다니. 이런 장르물스러운... ㅡ.ㅡ우웅... 그러나 속지 마시라. 여운은 여운이고, 이건 사랑과 우정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시즌2는 나오기 어려울 거 같다.
3. 싸나이의 우정물
요고 땡긴다...ㅎㅎㅎ. 나는 도중에 이게 우정으로 변질(?)될 줄 몰랐단 말이지! 걍 대결로 끝까지 갈 줄 알았다. 근데 이 두 사나이의 교감이 찐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어라라, 남녀커플보다 남남커플(콤비라 해야겠지만)에 더 눈을 반짝이게 되더란 말씀! 한 여자를 지독히 사랑하는 설정만 아니라면, 기냥 니네 둘이 연분인가보다 할 정도로 척척 들어맞는 콤비. 이 둘의 피 튀기는 대화 중에 명대사가 많은데, 일단 처음에 헉!한 거는 이 대목.
5화 주차장에서 서로 처음으로(?) 속내를 비치는 대목 서정호 "너 그렇게 끝까지 가봐, 어떻게 되나. 인간이 왜 불쌍한 줄 알아? 완벽하게 악할 수도 없기 때문이야. 니가 만약 끝까지 악할 수 있다면, 그땐 존경하지." 윤석기 "비겁한 놈. 데리고 살지도 못하면서. 너도 그렇게 끝까지 한번 가봐. 어떻게 되나? (중략) 김주희를 구하는 건 네 몫으로 남겨준거야. 니가 한번 구해봐. 사랑한다면."
11화 술집에서 서로의 속마음을 읽는 장면 서정호 "다 들켜놓고 어딜 가냐? 넌 절대로 김주희를 버리지 않았어. 도대체 뭐야? 널 어쩔 수 없게 만드는게."
"이제 내가 널 어떻게 맘놓고 미워하니, 이 나쁜 자식아!"
-->그런데 사실, 요 장면에서 "어? 어떻게 알아차린거야?"라고 생각했음... 여자도 눈치채기 힘든 고난이도 감정변화를 간파한 서변은 능력자!!! ㅎㅎㅎ 친구 소나무양은 이런 식으로 설명이 부족한 장면들 때문에 공감이 안됐다고 하더라. ^^;
윤석기 "사랑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떤 결정을 할 때 그 여자가 제일 먼저 생각나면, 그게 사랑이에요." 서정호 "좋겠다, 그런 사랑해봐서." 윤석기 "네. 좋아요. 행복합니다. 그래서 알아요. 선배님이 그 못지 않다는 걸."
크으...T^T 이러니 어째 안 멋지냐구. 와, 진짜 두근두근하며 봤다. 아무런 질투도 부러움도 냉소도 없이 순수하게 팬의 마음으로 드라마에 빠져든게 얼마만인지. 인물들이 너무 멋지다. 물론.. 흠을 잡자면 결말부가 쬐금 힘이 빠지는 면이 있다는 거.. 하지만 그게 또 이 드라마답다는 느낌이다. 기획의도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에 따라 180도 달라지는 삶"을 그리고 싶었다 하니.. 완벽하게 선하지도 못한 서정호와 완벽하게 악하지도 못한 윤석기의 관점에서 스토리를 따라가는 게 가장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막판에 남남커플에 닥빙한 나는 결말이 괜찮았으니까.
~단점이라 한다면~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여러 관점으로 볼 수 있다는 건 성격이 불분명하다는 뜻도 된다. 즉, 어떤 면에 주목해서 보든 아쉬움이 생기는 드라마이기도 한 것. 시청률 부재의 원인이 아닐까 한다. 나같이 주제파악 잘 안되고 전형성을 비트는 걸 좋아하는 사람에겐 몰라도, 좀더 선명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대중의 시각에서는 대박나기는 힘든 드라마였나 보다. 게다가 시놉시스를 보니, '우정으로의 변질'이 맞다!!! 애초엔 김성수 역할이 완전악역이었네. 어쩐지.. 중간에 확 달라진 느낌이 낯설다 했더니.. 근데 나는 그 변질이 나쁘지 않았다. 워낙 싸나이 교감 코드를 좋아하기도 하고. 뻔한 복수극이 아닌 편이 더 좋으니까. 하지만 통찰력 좋은 친구의 경우, 흥미가 뚝 떨어졌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싸나이 교감 코드도 장르물에서 즐겨쓰는 코드니까.. 이 드라마가 정체성 확립에서는 쫌 실패한 듯 하다. 그러나 나는 그래서 좋았다는 거... 내 취향에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은 이런 때라니까!!
또 하나는 산만한 조연들. 감초캐릭터를 못살린 것이 아쉽다. 이휘재를 위시한 젊은 변호사 3인방이 원래는 비중있는 조연이었던 것 같은데, 직장동료 이상의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오히려 박검사-송변-서변의 3인방이 더 매력적으로 그려져서 좀더 주인공에게 집중되는 효과는 있었지만 반대로 주인공들 이외에 눈 돌릴만한 감초캐릭이 없다는 것. 인물은 많은데.. 홍인기(비자금 관리인/드러난 악당 중에는 제일 윗선)나 고영웅(로펌대표)에 좀더 힘을 실어줬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홍인기는 둘째쳐도 고영웅 대표는 초반엔 거물급으로 나오다가 점점 흐릿해지는데 참 안타까웠다. 세파에 닳고 닳은 악당 역할의 두 축이 될 뻔 하다가...폭삭. -_- 절대적인 악당 역시 장르물스런 발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좀더 강했으면 싶긴 하다. 아마, 애초의 스토리는 그런 방향이었다가 중간에 틀어버려서 그 괴리감을 시청자도 느낀 게 아닐까? 그 외에는 너무 저렴하게 찍으셨다는 소나무양의 지적. ㅋㅎㅎ 하긴, 나도 클라이막스가 부두 하역장이라는 데는 쫌 헉했으니까. 그림 안나오게 왜 콘테이너 박스...ㅠ.ㅠ
뭐 어쨌든 나로서는 간만에 멋진 드라마 한편 봤다. 몇가지 단점도 있지만, 그게 시청률부진으로 이끌었을 것 같지만, 그래서 내게는 참 신선한 드라마였다. 특히 대사가 좋고, 김상경의 캐릭터와 연기가 좋고, 배우들이 잘하고, 저렴하게 잘 찍었...쿨럭. ㅋㅋㅋ 무엇보다 이 보일듯 말듯한 사랑이 좋았는 걸~. 변호사들, 멜로드라마의 롤모델로 삼으리라! >▼< 캬아~